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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개그계의 대부, 전유성을 추억하다
-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
- 작가에서 개그맨으로, 독특한 출발
- 개그콘서트를 만든 선구자
- 후배들의 아버지, 무명 개그맨의 후원자
-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맨
-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던 사람
- 전유성이 남긴 것들
"개그맨들 사이에서 '아이디어가 막히면 전유성을 찾아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2025년 9월 25일, 한국 코미디사의 산증인이자 '개그계의 대부'로 불리던 전유성이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개그계의 대부, 전유성을 추억하다
2025년 9월 25일 밤 9시 5분, 전북대학교병원에서 전유성이 폐기흉 증세 악화로 별세했습니다. 유일한 가족인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였습니다.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는 "이미 마음의 각오는 했지만,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며 애도를 표했습니다.
1949년생인 전유성은 단순히 개그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국 현대 코미디사의 설계자이자, 후배들의 길을 열어준 개척자였습니다.
📝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
전유성의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는 바로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처음 대중화시킨 것입니다.
희극인에서 개그맨으로
1970~80년대, 코미디언들은 '희극인', '코미디언'으로 불렸습니다. 전유성은 이 시대에 과감하게 **'개그맨'**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했고, 이것이 하나의 직업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 '1호 개그맨'
- '개그맨의 조상'
- '개그계의 대부'
로 불렸습니다.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었습니다. 전유성은 개그를 하나의 전문 공연 장르로 인식시키며, 한국 대중문화 속 개그의 위상을 끌어올렸습니다.
🎬 작가에서 개그맨으로, 독특한 출발
전유성의 데뷔 스토리는 매우 독특합니다.
화장실에서 시작된 인연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연출과를 졸업한 전유성은 정극 배우를 지망했지만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MC 곽규석의 '쑈쑈쑈' 녹화장에 구경을 갔습니다. 곽규석이 화장실에 가자 따라가서 물었습니다.
"이거 원고는 누가 써요?"
곽규석이 "내가 쓴다. 왜?"라고 하자, 전유성은 대담하게 제안했습니다.
"저... 다음부터는 제가 써오면 안 될까요?"
다음 녹화일, 그가 쓴 원고를 건넸고, 그의 유머와 아이디어들이 방송에 채택되면서 1968년 TBC 특채 코미디 작가로 데뷔하게 됩니다.
작가 출신 개그맨의 강점
작가 출신이었기에 전유성의 개그는 달랐습니다.
- 슬랩스틱 코미디가 주류였던 시절
- 무딘 듯 핵심을 꿰뚫는 언변
- 시대를 관통하는 풍자
- 관객의 허를 찌르는 무대 매너
이러한 특징으로 그는 단번에 **'국민 개그맨'**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 개그콘서트를 만든 선구자
1990년대 후반, 한국 코미디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 전유성은 또 한 번 선구자가 됩니다.
KBS 개그콘서트의 원안자
전유성은 대학로 소극장 개그를 방송에 도입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냅니다. 이것이 바로 KBS <개그콘서트>입니다.
개그콘서트의 혁신:
- 무대 세트 구조
- 시청자 참여 형식
- 후배 개그맨들의 자유로운 아이디어 실험 공간
- 공개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
이 프로그램은 방송 3사에 공개 코미디 붐을 일으키며 20년 넘게 장수했습니다.
대학로와 지방 무대까지
전유성은 방송의 울타리를 넘어 대학로와 지방 무대에서 소극장 공연을 기획하고, 후배들에게 무대를 내어주며 한국 코미디의 외연을 넓혔습니다.
💖 후배들의 아버지, 무명 개그맨의 후원자
전유성의 진가는 후배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아이디어가 막히면 전유성을 찾아가라"
개그맨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막막할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전유성을 찾아가면 해답이 있었습니다.
사비를 털어 후배 지원
그는 개그맨 지망생과 무명 개그맨들을 발굴하고 사비를 털어가며 지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후배 개그맨들의 증언:
- "늘 후배들을 지지해주셨다"
- "신인들에게 무대를 만들어주셨다"
- "조건 없이 도와주셨다"
마지막 순간까지의 배려
입원 중에도 후배들이 찾아오면 알아보고, 힘들어도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도 농담을 던지며 후배들에게 "건강해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맨
전유성은 단순한 개그맨이 아닌,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맨이었습니다.
다양한 시도들
- 인사동에서 **'학교종이 땡땡땡'**이라는 복고풍 카페 운영
- 심야 볼링장 창안
- 심야극장 창안
- 진로그룹 이사 역임
- 영화 감독으로도 활동 (1991년 <칙칙이의 내일은 챌피언>)
디지털 시대의 선구자
놀랍게도 전유성은 IT와 디지털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저서들:
- '컴퓨터, 1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 'PC통신,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 '인터넷, 일주일만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1990년대에 이미 IT 서적을 낸 개그맨이었습니다.
인문학적 깊이
-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 '전유성의 구라삼국지'
유머와 인문학을 결합한 독특한 저서들을 남겼습니다.
🌟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던 사람
전유성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도
후배 개그맨 양희은은 "며칠 전 가서 뵐 때만 해도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회복되면 제일 먼저 (카페) 와 본다고 했다"며 추모했습니다.
개그맨 박준형은 "지난 6월 공식 석상에서 축사하시는데 어지럽다고 손잡아달라고 해서 말씀하시는 내내 부축해 드렸다. 손은 가늘고 야위었으나 말씀하시는 기백과 유머는 참 대단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준비된 이별
전유성은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 희극인 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
- KBS에서 노제를 지낼 것
- 지리산 자락 남원에 수목장으로
모두 본인이 직접 지시한 내용이었습니다.
🕊️ 전유성이 남긴 것들
한국 코미디의 토대
- '개그맨'이라는 정체성
- 개그콘서트라는 플랫폼
- 공개 코미디라는 장르
- 작가 출신 개그맨의 길
후배들에게 남긴 유산
- 아이디어와 영감의 원천
- 무대를 만들어주는 정신
- 후배를 아끼는 마음
-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 자세
대중에게 남긴 기억
- 1970~80년대 방송 코미디의 전성기
-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의 추억
- 지성과 유머가 결합된 개그
💐 마무리: 별이 된 개그맨
전유성은 '개그맨'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그 길을 닦은 사람이었습니다.
후배들은 그가 만들어준 무대에서 웃음을 만들고, 그가 남긴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시대의 코미디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전유성 약력
- 1949년 1월 28일 서울 출생
- 1968년 TBC 특채 코미디 작가 데뷔
- 1969년 MBC 방송 작가 정식 데뷔
- 1970~80년대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 활약
- 1990년대 개그콘서트 원안 및 기획
- 2025년 9월 25일 별세, 향년 76세
🏛️ 장례 정보
- 빈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 장례 형식: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
- 노제: KBS 일대
- 안장: 남원 지리산 자락 수목장 예정
"개그맨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무대를 만들어주고, 웃음을 나눠주던 전유성.
그가 만든 '개그맨'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전유성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